2023년. 11월 24일. 일상 안내자님 강의가 끝나고
일상의 숨 1기 두번째 줌 강의가 지금 막 끝났다. 선생님 목소리는 차분하고 편안했지만 그 안에 흐르던 선생님 열정은 가슴에 한동안 열기를 머금고 있게 한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깨달음의 실체에 접근하는 법” 평생을 찾아헤맨 그것을 이제는 제대로 만났다는 감사함에.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어디에도 없던 가르침을 살아있는 목소리로 전해 듣는 떨림. 지금 내 몸을 흐르는 것은
이것이다. 물 흐르듯 바람불듯 가기에 범인 같지만, 진짜만
드러낼 수 있는 그것을 내 몸안으로 흘려낸 후 느끼는 감각. 그 생생하고 선명한 알아챔. 숱한 가짜를 겪은 후에 만난 진짜. 그렇기에 나의 감사함은 크기를
잴 수 없었다. 일상 선생님과의 인연 그리고 일상의 숨 가르침과의 인연은 내게.
어디까지 갔던걸까. 나는 무엇을 찾아 그리도 먼 길을 떠났던 걸까. 돌아보면 나의 그동안은 단 한 점을 향한 여정이었다. 그것이 수행이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모든 순간들조차. 사람들은 화두를 찾아다니고 스승을 찾아다녔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내 삶 자체가 화두였고 그것을 풀기 위해 나는 일찍이 홀로 길을 떠났다. 속에서는
남들과 똑같이 섞여 있었지만, 내 안에서는 내 집을 떠나 우주의 가장 머나먼 곳들을 헤매다녔다. 그 길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기에 의지할 곳이 없었다. 내가 ‘도’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극한의 외로움이 그것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내가 하고
싶던 건 그저, 나의 고통을 끝내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내 화두의 출발이었다.
그러다 한 고통 앞에 산산이 부서졌을 때 나는 또다시 죽음을 생각했다. 스스로 생을 단념하는
것. 그것이 아니라면 길은 하나였다. 기성 종교에서 가리키는
것이 아닌 완전하게 다른 방식.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서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찾아나서는 것. 인간의 인식 너머의 진짜
세계와 접속하는 것. 신과의 직접 접촉. 그것이 명상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해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내 첫 사이비 명상단체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너무나 진짜 같았던 가짜. 너무나 인간적이고
따뜻했던 도반들.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들. 무위법의
인연으로 만났다 여겼던 사람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순진함과 무지가 빚은 결과였다.
허망한 믿음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내 안의 두려움’이었다. 다시는 혼자이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다시는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그랬기에 나는 신을 대리한다는
또다른 ‘망상적 존재’에게 내 마음을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은 모래로 만든 방패 뒤에 숨어있으려던 ‘어린 마음’이었음을 모른 채로. 여느 많은 단체들처럼 구루의 실체를 알게되었을
때의 배신감. 그것은 신에 대한 배신감으로 다가왔고 그렇게 나의 뜨겁고 순수했던 도를 향한 여정은 막을
내렸다. 나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겨우 숨을 부지한 채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명상이란 단어를 듣기만 해도 깨달음이란 말이 들리기만 해도 귀를 닫고 눈을 감았다. 이제 그런 것은 쳐다도 보지 않으리라 했다. 소위 깨달음 병에 걸려있는
몽유병 환자 같은 사람들 모습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알게되었다. 인간이 기대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의 허약함을. 그것은 순전히 ‘내가 바라는 것’을 의념화 한 것이며 그 상념에 에너지를 많이 쏟을수록
힘이 세진다는 것을. 사람들에게는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믿고 싶은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사람은 진실에 기대에 사는 게 아닌, 자신의
두려움을 가려주는 것에 의지하여 산다는 것을. 그 두려움을 믿음이라는 단어에 투사하였기에 끝까지 진실을
마주하기를 거부한다. 무서운 건 진실이 아니라 ‘가짜 믿음’이 무너질 때 대면해야 할 자신의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괴물은 실은 우리 안의 내면의 두려움이 투사된 것들이기에. 내 안의 두려움을 마주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거기서 모든 책임 공방과 비난과 배신과 살인이 이루어진다. 내 안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모습으로, 가장 끔찍한 괴물로 내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의 사이비 경험에서 얻은 것은 그것이었다. 결국 그 ‘괴물
같던 구루’ 또한 그 당시의 내 모습이었다는 것. 짙은 자기
혐오로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세상을 믿지 못하여 망상이라는 것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던 ‘나의 슬픈
내면’ 말이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나의 할 일이었다. 내 안의 슬픔과 두려움을 가리려 도망다닐수록 그것은 더욱 끈질기게 나를 쫒아온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 안의 괴물을 대면하는 것. 이제는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근원으로 보내주는 것. 괴물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리하여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더
이상 무엇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
하지만 인간은 어리석어서 진정으로 깨어나기 전까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제는 진짜라
여겼던 또 다른 가짜. 그리고 계속된 삶의 시련들. 그것들을
통과하며 알게되었다. 나를 찾아오는 배신과 시련들은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책임지지 않았기에 찾아왔다는
것을. 나는 지금껏 내 존재 의의를 ‘그들 모두’에게 떠넘기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나를 책임질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나의 고통과 삶의 짐은 누구도 나 대신 짊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설사 그것이 神일지라도. 모든 건 나에게서 나온 것이니 나만이 거두고
끝맺을 수 있다는 각성. 어떤 것도 원망할 것은 없으며 나는 오직 나만 책임지면 된다는 자각. 나를 온전히 책임질 때 내 주변의 모든 것도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앎. 나는
절벽 끝에 다다라서야…. 간신히 매달려있던 절벽에서 두 손을 떼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나를 던졌다. 그때 일상 선생님을 만났다. 진정으로 나의 의식적인 모든 의지를 완전히 놓았을 때. 나라 여겨진
모든 것에서 나를 떼어 나를 0 (진공의 상태)에 두었을
때.
인연은 주파수가 같아야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때 내가 두려움을 꽉 쥔 채 버티고 있었다면
선생님이 계신 그 자리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나의 존재를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다면
성립하지 못했을 만남이다. 내가 나를 완전히 놓았기에 나를 하늘 의지에 맡겼기에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나에게 그런 경험이 찾아온 건 구루 탓도 아니고 나를 거기에 소개해준 사람 탓도 아니었다. 그 경험은 순전히 내가 나를 깨고 나아가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장치였을 뿐이다. 그 안에서 상처받고 웅크려있는 내 안의 괴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는 진짜 나의 길로 나아갈 수 없었을테니까.
그래서 감사하다. 거기서는 배워본 적도 없던 진짜 명상을 이렇게 배울 수 있는 오늘에. 이렇게 다시 수행이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 오늘에. 내 안 깊이
감추어놓았던 불을 다시 꺼낼 수 있는 오늘에. 큰 목소리 한번 내시지 않았지만 호흡 수련의 정수가 녹아있던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찼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오늘에. 그래서 나는 다시 가슴이 뛴다. 일상의 숨을 통해 처음으로 ‘진짜 숨’을 만난 이 순간들에. 자유에 다가서는 실체적 방법을 오직 자신의
경험만으로 이토록 잔잔하게 전하여줄 수 있다는 것. 그러한 안내자를 만났다는 것. 먼 길을 돌아와 본 사람들이라면 그 의미를 알 것이다. ‘의식만이’
오로지 이 우주의 실체라는 것을 확인한 오늘이, 고요한 시냇물 같은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이 순간이
지닌, 감사함의 깊이 말이다
힘주지 않고 거들먹거리지 않고 세력 만들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담백함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르게 관(觀)하는 존재. 일상 선생님이 내 앞에 계시는 한 나는 다시 힘을 내어 걸을 수 있을 거 같다. 내가 그토록 가고자 했던 그러나 찾지 못했던 길, 스스로 자유가
되는 길. 그리하여 나의 밝은 숨이 온 만물에 따뜻이 스며들기를 바랬던 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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